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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감독의 La mala educaión은 일상적으로 받는 학교교육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종교라는 위대하면서도 절대적인 상황을 놓고 금기시된 사랑과 행위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사랑을 특이한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1990년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했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에서 종교적인 장면들을 모티프로 삽입하여 불가능한 사랑을 운명적으로 점지어 운명은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설정되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종교학교 안에서 행해졌던 금기시된 행위와 폭행 그로 인해서 성장 이 후에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나쁜 교육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우선 이 영화는 시작(Opening)장면에 만화적 요소와 긴장감 있는 음악을 삽입하였다만화적 요소라서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장면을 잘 들여다보면예수의 얼굴 배우들의 눈빛 그리고 상징적인 물건들이 많이 나온다예수가 십자가에 박히는 모습을 어린애들로 대신해서 그려 놓기도 하고 신부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고민하는 장면들도 나온다이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특히 장미 그림이 하나 나오는데 이는 나중에 무대에서 장미를 들고 여장연기를 하던 앙헬(Angel)을 비너스적으로 상징한 것처럼 느껴졌다또한 제목이 나오는 시점에 십자가가 의미심장하게 나오는데 십자가를 자세히 보면 주인공들의 얼굴들로 짜깁기 되어 나타나 있다.

 

 

 

 

           영화는 앙헬이 엔리께(Enrique)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엔리께에게 앙헬이 건내준 이그나시오(Ignacio)의 시나리오는 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이뤄가는 하나의 뼈대가 된다또한 이 시나리오는 이그나시오의 시각이지만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엔리께의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인지도 모른다. 방문객(La visita)이라는 제목의 이 시나리오를 읽을 때 뻬드로 감독은 영화 프레임의 좌우를 줄임으로써 영화 속의 또 다른 시나리오임과 동시에 엔리께가 현재 시나리오를 통해서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처음의 회상 장면은 이미 성장된 이그나시오와 엔리께의 재회를 보여주는데 장미를 들고 여성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선 이그나시오는 엔리께에게 Quizás Quizás Quizás´의 노래를 부르는데이는 현재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가사와 맞아 상황에 맞는 음악적 요소를 삽입한 뻬드로 감독의 위트를 볼 수 있다둘은 호텔에서 관계를 가지고 편지를 엔리께의 옆에 놔두고 떠나는 이그나시오의 편지를 놔두지만 이 시나리오가 편지와 겹치며프레임은 다시 커지고 현재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엔리께로 돌아온다즉 그의 시나리오는 엔리께에게 과거를 회상하는 하나의 매개체이며 동시에 엔리께를 다시 과거로의 una visita가 아닌 그들의 관계에서만 사실을 알 수 있는 하나의 la visita로 만드는 소재이다이는 후에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에서 이그나시오의 죽음으로 영화를 수정해서 제작하는 엔리께에게 베렝게(Berengue)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지?라고 말하는 대사로 받게된다.

 

           이그나시오는 그의 친구와 함께 교회를 방문해서 마놀로(Manolo) 신부를 협박한다어린 시절 종교 학교에서 신부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이그나시오는 그가 신부와 이야기하는 사이 친구에게 교회에 있는 물건들을 훔치도록 지시한다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물건을 훔치는 장면을 찍을 때영화 화면 자체에 천사상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일부러 나쁜 행위를 하는 장면에서 천사상을 화면 내에 감시자 역할로 배치함으로써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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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어린 시절로의 회상으로 돌아가보면 이 장면에서는 나쁜 교육을 행하고 있는 신부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이그나시오를 신부들 앞에 불러두고 노래를 시킬 때의 카메라 구도는 왼쪽의 다수의 신부집단과 오른쪽의 이그나시오 한 명이 대비적인데이는 이 당시 강압적으로 구속을 당하고 있는 이그나시오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와닿도록 설정되어 있다심지어 이그나시오는 신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신부의 위선을 비꼬고 있다이 장면은 마놀로 신부의 입과 성배만이 클로즈 업(Close up)되어 연출되는데 성스러운 성배의 모습과 위선적이고 거짓된 마놀로 신부의 말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역설을 만들어 냄으로써이그나시오의 신에 대한 믿음에의 배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신부와의 대화에서 이그나시오의 머리에서 한 줄기의 피가 흐르는데 그 피가 경계선이 되어 머리가 두 쪽으로 벌어지며 화면이 전환된다이 장면은 이 종교적이고 거룩한 곳에서 가장 신성해야 할 마놀로 신부가 자신을 성폭행하는 모습들을 통해서즉 이렇게 어린 시절의 나쁜 교육들 때문에 이그나시오 자신의 성 정체성 혹은 정체성이 분열되어 버렸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그의 시나리오 속에 그는 녹여 놓았다.

 

           엔리께와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간 장면에서 이 둘의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우선 영화관 앞의 포스터에는 Esa Mujer가 입구 양쪽에 배치되어있다영화관 안에서 둘의 행위는 둘이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하지만 이보다 영화의 내용이 이 둘 앞에 펼쳐질 삶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에인생에의 복선으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그 둘은 마놀로 신부 때문에 곧 헤어지게 되지만 그들의 조우를 현재의 시각으로 돌리며 다시 프레임이 넓어진다.

 

           앙헬과 엔리께의 La visita영화를 촬여하는 장소에 베렝게(마놀로 신부)가 나타난다그리고는 엔딩 장면을 수정한 엔리께에게 이그나시오의 해피 엔딩이 아닌 실제처럼 살인을 당하는 장면을 어떻게 알고 고쳤는지 물어본다그러면서 당시의 상황으로 회고를 하게되는데교회에서 추방되어 출판사에서 일하는 베렝게에게 이그나시오의 협박 전화가 걸려온다이 때 베렝게를 측면에서 클로즈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베렝게의 배경에 거미줄 같은 추상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앞의 장면에서 그는 사무 실에 있었고 그런 벽지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서 통화를 하면서 복잡한 베렝게의 심정을 표현하였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이그나시오를 찾아가는 그의 모습을 담은 장면에서 아주 무거운 음악이 흐른다그를 협박하는 이그나시오를 찾은 베렝게는 거기서 이그나시오의 동생 후안을 보고 다시금 사랑을 느낀다특이한 점은 이 장면들을 설명하는 엔리께에게 설명하는 동안의 장면은 과거 회상의 장면이지만 프레임의 크기에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이를 통해서 이 영화에서 프레임이 작아지는 회상장면은 모두 시나리오에 나오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깊어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뻬드로 감독은 코믹적인 요소를 잃지않고 있다가령 후안이 짧은 반바지만 입고 운동을 하는 장면에서 그의 엉덩이는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운동을 한다그를 바라보며 베렝게는 욕망이 점점 더 깊어져갔다.라고 말을 하며 장면이 걸어오는 대화를 대사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가 고향으로 떠나갈 때 이그나시오의 집에 방문한 베렝게를 포착한 장면을 보면둘이 한참 티격태격하는 사이 후안이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게 된다이 시점에서 카메라는 베렝게에게 아웃포커싱(Out-focusing)된다즉 화면에 있는 이그나시오는 흐릿해지며 초점에서 멀어지고 베렝게의 관심이 점점 오직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즉 이러한 효과를 통해서 그의 방문이 더 이상 이그나시오에게 돈을 갚는 것이 아니라 후안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후안과 베렝게는 함께 이그나시오를 살해하기로 한다시장에서 그의 살인을 모의하는 둘의 모습에서 재미있는 점은 다양한 얼굴의 동상들이 장면에 크게 배치되고 있다는 뜻이다사실 이 장면에서는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얼굴들을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한다베렝게도 겉으로는 처자식이 있는 남자이며한 때는 신부였고후안 또한 엔리께에게 호모자식이라는 대사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엔리께가 혼자 생각하는 장면에서 나온 것처럼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단지 목적을 위해서 몸을 주지만속은 알 수 없는 사람이다직업이 배우인 것도 크게 작용한다나아가 처음 엔리께를 찾아왔을 때부터 그는 배우로써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이그나시오인 것처럼 행동을 한다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 대부분은 내적 자신과 밖으로의 자신을 달리하며 상황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얼굴들과 살인의 모의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내용은 나쁜교육으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신학교에서 이뤄진 신부의 금기된 행동으로 인해서 문리버를 아름답게 부르던 소년이 순수하게 사랑했던어쩌면 어린시절의 우정이었을지도 모를 친구 엔리께를 잃고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또한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의 분열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마저 잃게 되어 버린다순수하던 소년이 나쁜 교육으로 인해서 마약에 찌들어 사람을 협박하는 장면은 썩은 폐와 건강한 폐를 보여주며 금연을 하라고 하는 캠페인적인 효과로 각인된다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그나시오로부터 엔리께가 받은 편지에 보면 그는 나는 해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무엇을 해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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